•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10가지 원리
    [책소개] 『불평등의 이유』 (노엄 촘스키/ 이데아)
        2018년 04월 14일 11: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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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하게 태어나도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어지간한 일자리를 구하고, 집을 사고, 차를 사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다는 생각……. 이런 꿈이 모조리 무너졌다.”

    노엄 촘스키는 이 책 《불평등의 이유》 맨 앞장에서 담담하게 말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 되어버려서 새로울 것이 없는 탓인지 절망의 언어가 그저 덤덤히 다가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세계적으로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인 촘스키는 ‘좋아진 시대’에 왜 여전히 다수는 불평등한지를 차갑게 들여다본다.

    이 책의 원제는 ‘Requiem for the American Dream’으로 직역하면, ‘아메리칸 드림의 진혼곡’쯤 될 수 있다. 책의 제목이 말하듯이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우며 여전히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그리고 그 현실을 상징하던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뿐만 아니라 세계는 이미 충분히 불평등하다.

    촘스키의 첫 주제, ‘불평등’에 대하여

    1928년생인 촘스키는 이제 90세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지성의 힘은 조금도 줄지 않은 듯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는 한결같이 대중의 편에서, 사회의 가장 왼쪽 자리에서 거침없는 목소리를 내왔다. 혁신적인 이론을 내놓은 언어학자이기도 하지만, 그는 언제나 주류보다는 소수자의 편에 있었고, 공화당이나 민주당에게 때로는 양당 모두에게 항상 비난을 받았으며, 주류 학계와 언론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1967년 2월 《지성인의 의무The Responsibility of Intellectuals》라는 에세이를 발표하며,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이를 기점으로 한 현실참여에서 비롯된 그의 사회 참여적인 저술 활동은 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 정책과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가 낳은 폐해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이번 책은 다소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 확대가 낳은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을 정면으로 겨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책은 그동안 촘스키가 설파했던 정치와 경제에 관한 논의를 일반 시민의 눈높이에서 가장 압축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역사적 사례부터 최근 국면에 이르기까지 촘스키가 꺼내놓은 사례들은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오늘날 부와 권력의 집중을 낳은 10가지 원리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를 축소하라’,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라’, ‘동의를 조작하라’, ‘국민을 주변화하라’ 등 책에서 설명하는 10가지 원리는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불평등이 극적으로 확대되고 민주주의가 점점 껍데기만 남고 부실해지는 많은 나라에서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데이비드 흄과 제임스 매디슨을 거쳐 마틴 루서 킹 2세, 그리고 종종 함께 거론되곤 했던 친구 하워드 진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와 권력의 본질을 탐구하고 포착했던 이들의 입을 빌려 촘스키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작동 원리를 들려준다. 애덤 스미스의 ‘비열한 좌우명’이나 ‘피통치자들이 한데 뭉치면 언제든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흄의 통찰, 매디슨이 옹호한 ‘부유한 소수’, 월터 리프먼의 ‘동의의 조작’ 등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구절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이 책은 촘스키의 정치적 저작을 응축한 작품이기도 하다.

    “유명한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에서 애덤 스미스는 잉글랜드에서 ‘주요한 정책 설계자’는 사회를 소유한 사람들, 즉 그 시절에는 ‘상인과 제조업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잉글랜드 국민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리 ‘가혹한’ 영향이 미친다 할지라도 자기들의 이익이 충실히 보호받도록 확실히 보장한다. 오늘날에는 그 주인공이 상인과 제조업자가 아니라 금융기관과 다국적기업이다. 스미스가 ‘인간 지배자들’이라고 지칭한 이들은 “모든 것은 우리가 챙기고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라는 ‘비열한 좌우명’을 따르고 있다. 그들은 그저 자기에게 이익을 주고 다른 모든 이에게 해를 끼치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9-10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훗날의 매디슨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만약 아테네의 정치체제가 자유민 남성을 위한 민주주의라면, 빈민들이 한데 뭉쳐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똑같은 딜레마에 부딪혔지만, 두 사람은 정반대의 해법을 내놓았다. 매디슨이 내놓은 해법은 민주주의를 축소하는 것, 즉 부유층의 수중에 권력을 두고, 국민들이 하나로 조직되어 부자의 권력을 빼앗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국민들을 파편화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법은 정반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복지국가를 제안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불평등을 축소하자고 말했다. 공공 급식같이 도시국가에 적합한 조치를 통해 불평등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똑같은데 해법은 정반대다. 한쪽은 불평등을 축소하면 이 문제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를 축소하자고 말한다. (24-25쪽)

    헌법, 급진적 자유와 평등을 가두는 장치

    촘스키가 설명하는 것처럼, 미국의 국가 기틀을 세운 헌법은 한편으로는 자유와 평등, 새로운 세계에서 누구나 꿈을 펼칠 기회를 약속하면서도 그 이면에서는 교묘하게 부와 권력의 불평등에 바탕을 둔 체제를 지키려고 했다. 다수 대중이 뭉쳐서 자유와 평등을 급진적으로 요구하는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한 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신봉한 일반 대중은 그 꿈을 좇아 근면하게 일하면서도 불평등에 맞서 자신들의 기회와 권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부와 권력은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고, 동의를 조작하면서 이러한 요구와 운동에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공평한 경쟁을 위해 경제를 규제하려 한 이들의 연대는 공격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일반 대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끊임없이 자리매김 시켰다. 사람들을 덫에 가두거나 구경꾼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덫은 빚의 형태로, 구경꾼은 소비자로 구현됐다.

    사람들을 덫에 빠뜨리는 아주 중요한 또 다른 형식은 빚이다. 빚은 미국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고, 그 역사도 흥미롭다.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 영국은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노예들이 자유를 얻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노예들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계속 일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쨌든 어디에나 땅은 널려 있으니, 노예들이 그곳을 떠나 자기 땅뙈기를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을 소비주의의 덫에 빠뜨리는 것과 똑같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선전과 광고를 물량 공세로 퍼부어서 해방된 노예들이 이 상품을 가져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면 되었다. 해방된 노예들은 회사 상점에 가서 상품을 사면서 빚을 졌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덫에 빠졌다. 노예 경제가 다시 세워진 것이다. (170쪽)

    모든 사람을 통제하여 사회 전체를 완벽한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완벽한 체제는 한 쌍dyad에 기반을 두는 사회가 될 것이다. 당신과 텔레비전, 아니 지금은 당신과 아이폰과 인터넷이 한 쌍이다. 그런 것들이 제대로 된 삶(가져야 하는 기기, 건강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당신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필요하지 않거나 원하지 않지만(어쩌면 나중에 던져 버릴지도 모르지만), 버젓한 삶의 척도인 그런 것들을 얻으려고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168쪽)

    부와 권력은 오히려 자본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촘스키는 걸핏하면 자본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핏대를 세우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허위와 위선을 폭로한다. 오히려 “부자와 권력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는 즉시 ‘보모국가’로 달려가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금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한국 역시 IMF 외환위기를 통해 납세자들의 돈이 어떻게 재벌 기업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가는지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런 식으로 보장된 부와 권력의 집중은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부의 집중은 권력의 집중을 낳는다. 특히 선거 비용이 급증해서 정당이 주요 대기업의 주머니 속으로 한층 더 깊숙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대공황 이래 최대의 금융위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부시와 오바마가 구제 금융에 나서 유력한 기관(범인)들의 구조를 재편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표류하게 내버려 두었다. 국민들은 집과 일자리를 빼앗기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지금 우리는 그 폐허 위에 서 있다.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고, 위기를 초래한 주역들은 다시 그다음 위기를 쌓아나가고 있다.

    그때마다 납세자는 위기를 야기한 이들을 구제하라는 요구를 받는데, 점차 주요 금융기관이 그 대상이 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보통 그렇게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 대신 위험한 투자를 하는 투자자들을 일소하고자 한다. 그러나 부자와 권력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곤경에 빠지는 즉시 ‘보모국가nanny state’로 달려가서 납세자의 돈으로 구제 금융을 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들은 정부 보험증서를 받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얼마나 자주 온갖 위험을 무릅쓰든 간에 곤경에 빠지면 국민들이 구제해 준다는 것이다. 너무 덩치가 커서 파산하게 내버려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고 있다. (116쪽)

    희망의 끈

    분노를 담은 날카로운 문장으로 미국 대외 정책의 허구를 낱낱이 해부하던 전작들에 비하면, 이 책의 어조는 다소 담담하게 가라앉아 있다. 잃어버린 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려면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를 찬찬히 더듬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 세대보다 나은 삶, 아니면 그보다 조금 떨어지더라도 최소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경제는 위기를 거듭하며 점점 불안만 키우고 있다. 기후변화의 위험은 코앞에 닥쳤다. 냉전이 끝난 지 오래건만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언론까지 집어삼킨 다국적기업은 거대하게 몸집을 키우면서 사람들의 생활과 정신의 구석구석까지 촉수를 뻗친다.

    이런 상황에서 촘스키는 차분한 어조로 우리에게 묻는다. 매디슨의 조언처럼 민주주의를 축소할 것인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내놓은 해법처럼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불평등을 축소할 것인가?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자신과 주변의 현실을 파악할 이성의 힘이 있으며, 시민이라면 누구나 동료 시민과 토론하고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자신과 함께 성찰하고 행동하자고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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