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그 남한산성을 둘러보다
[기고] 병자호란을 상상하는 산행
    2018년 02월 13일 02: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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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남한산성에 또 갔다. 오늘은 수어장대를 비롯한 요소요소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었다.

먼저, 행궁 쪽으로 갔다. 왼쪽에 장대한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수령 6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가 튼실하고 거대한 몸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행궁에 틀어박혀 전전긍긍했을 터인데 그때 그런 임금을 보았을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인간의 수명 보다 열 배는 너끈히 살아내니 경외감마저 들었다.

우리는 북문 쪽으로 올라갔다. 적송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수피가 붉은 빛을 띠는 소나무들, 대개 수령이 200년 가까이 되어 보였다. 길쭉하게 본체를 쭉 뻗기도 하고 가지를 사방으로 펼친 적송들, 신묘한 생명의 기운이 꿈틀대는 것 같기도 하고 멋있었다.

북문에 도착했다. 인조가 1637년 2월에 송파 삼전도로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러 갔을 때 통과했던 문이었다. 북문의 이름은 전승문이라고 한다.

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하단 부분은 커다란 바위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견고하게 서로 맞물렸고 올라갈수록 크기가 작아졌다. 아치형 구조로 윗부분을 처리하고 상단을 쌓고 문루를 얹었다. 나는 문을 통과해 성 바깥쪽을 내다보니 가파른 비탈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조는 1637년 2월에 북문을 빠져 나갔을 터인데 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가늠할 수도 없었다. 비탈의 끝부분에서 넓은 평지가 보였는데 비닐하우스 수십 동 등 마을이 있었다. 그곳에 청나라 군대가 포진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성첩 계단 길로 걸으면서 성 바깥 경치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부츠 구두를 신은 아내가 넓은 길로 걷자 한다. 우리는 성첩 옆으로 나있는 보부상들이 다녔다는 ‘봉행길’로 걸으면서 이동했다. 성첩은 북문에서 서문, 남문 쪽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울창한 적송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른이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는 몸통이다. 사방으로 뒤틀리듯 뻗어나간 가지들이다. 붉은 빛을 띠는 수피가 아름답다.

아내에게 내가 말했다. ‘여보, 저 소나무들이 참 보기 좋지? 나는 천상 작가이고 예술가인 모양이야. 내 안에서 지금 감흥이 일어난다.’ 하니까 아내가 대답했다. ‘나는 그냥 그렀네. 그리고 당신은 예술가가 아니야. 애술가라고 발음하잖아, 당신은 애술가야.’ 했다.

경사가 심하고 눈으로 얼어붙은 길을 엉금엉금 올라갔다. 다시 성첩이 나타났다. 우뚝 서 있는 잠실 롯데타워가 보였다. 성첩 바깥에는 도시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가까이 잠실, 송파 지구가 있었다니. 남한산성은 지대가 꽤 높은 모양이었다.

도시를 바라보며 1637년 병자호란 때를 상상해 보았다. 바로 앞 저곳에 청나라 군대가 포진했을 것이다. 조선 병사들은 성첩 뒤에 몸을 숨기고 추위에 떨고 있었겠지. 방한복이나 제대로 있었겠나, 허술한 군복에 참 힘들었겠다 싶었다.

성첩 곳곳에 뚫려 있는 총안이 눈에 들어왔다. 총안은 성 안쪽에서 바깥 적을 향해 활, 총포 등을 발사할 수 있는 직사각형 공간이다. 그러자면 밑쪽으로 경사가 지고 바깥으로 넓어지는 구조가 되어야 비탈을 오르는 적병을 훤히 볼 수 있고 기능을 제대로 살릴 수 있겠는데, 총안은 모두 경사가 없고 넓이가 일정하다. 적을 공격할 수 없는 구조다. 문화재를 볼 때 간혹 느끼는 것이지만, 고증이 부실해서 사실과 다른 모습을 연출하면서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하거나 왜곡하는 게 많은데 여기서도 그러하다. 아쉽다, 모호한 고증은 탐방하는 이들에게 모호한 사유를 하게 할 것이기에.

총안- 성 바같쪽 적들에게 활, 총포 등을 발사할수 있도록 설치된 공간.

우리는 계속 서문 쪽으로 올라갔다. 경북 봉화가 목적지로 보부상들이 다닌 길로 ‘봉행길’ 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간이 탁자를 펴고 막걸리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등산객들이 서너 명 멸치 안주에 막 술을 따르고 있다. 흐흐흐, 풍경이 좋다. 아내에게 금주를 선언한 게 얼마 전인데 무척 아쉽다. 이렇듯 나의 의지를 시험하는 게 세상에는 널려 있는 듯하다.

서문이 나타났다. 어른 둘이 손잡고 지나면 비좁을 정도로 작은 문이다. 문 위에 문루가 있다. 나는 성첩 쪽으로 올라갔다. 문의 오른쪽 성첩 바로 앞은 양지바른 곳이었다. 조선 병사들이 보초를 서다가 햇볕에 몸을 녹일 만한 곳이었다.

‘청량당 이야기’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청량당은, 인조 당시 무반이었던 이회와 그의 처첩의 넋을 위로하고자 세운 사당이라고 한다. 이회는 남한산성 남쪽 성벽 축성 책임을 맡은 장군이었는데 공사비를 횡령했다는 누명을 쓰고, 서장대에서 참형을 당했다 한다. 구명자금을 모으고자 각지를 떠돌던 그의 처첩이 소식을 듣고 절망하여 강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한다. 뒤늦게 이회가 축성한 성벽은 견고하게 쌓아졌음이 밝혀졌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그와 처첩을 백성들이 신으로 받들어 모셨다 한다.

서장대는 무엇 하는 것일까. 동장대도 있다. 남한산성 서쪽 방면 방어를 책임진 장수의 지휘소가 서장대일 것이었다. 수어장대는 총사령관의 지휘소일 것이었다. 우리는 서문을 지나고 수어장대로 올라갔다. 수어장대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성 바깥 쪽 아래 전망이 한 눈에 들어왔다. 넓은 평지는 도시가 되었고 롯데타워가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멀리 송파강과 한강이 보였다.

수어장대- 남한산성 군사.행정 총 책임자인 수어사(종2품직)의 지휘소. 남한산성내 수어청의 수장이기도 한 수어사는 한양 도성 남쪽 방면 방어 총사령관이기도 함

병자호란 당시, 방어 총사령관 수어사의 심정은 어땠을까. 적의 막강한 전력에 기가 질렸을까. 긴박한 상황에서 행궁으로 오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장수가 전쟁에서 전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최선을 다한 끝에 맞는 죽음이었다면 담담하게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수어장대 앞에 ‘청량당’이 있었다. 한 쪽에 향나무가 옆으로 기듯 하다가 위로 뻗고 있었다. 우리는 수어장대 앞으로 갔다. 널찍한 공터가 있고 뒤에 5층 높이 정도의 수어장대가 있었다.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다면 멀리 한양 도성과 경복궁까지 보였을 것 같았다.

오른쪽 한 모퉁이에 ‘리승만 대통령 각하 기념식수’라고 쓴 석비가 있고 제법 큰 전나무가 서 있다. 1960년 이전에 심었다면, 나무의 나이는 60살이 넘었을 것이었다.

수어장대를 정점으로 하고 우리는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른쪽 옆으로 성첩이 이어지다가 길은 안쪽으로 나기 시작했다.

그 지점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온 노점상 한 분이 번데기를 팔고 있었다. 출출하던 참에 번데기를 좋아하는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아내는 먹지 않는다. 커피도 팔기에 아내에게 권했지만 싫다 했다. 나는 번데기를 금방 먹어치웠다.

길은 내리막이고 얼음판이라 위험했다. 구두를 신은 아내는 더욱 난감했다. ‘여보, 자세를 낮추어야 돼. 무릎을 접어.’해도 아내는 그게 잘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엉금엉금 기듯이 무언가 붙잡고 내려가야 할 것 같았다. 모퉁이에서 잠시 쉬었다.

전방으로 산의 능선과 행궁 쪽 마을이 보였다. 남한산성은 천험의 요새라 할만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말발굽 형으로 산의 능선들이 연결되어 있고 밑에는 분지가 꽤 넓다. 군량을 충분히 확보한 수비군이라면 장기 농성이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 군·민이 먹을 식량은 50일 분 정도였다 한다. 거기다가 사방으로 아군과 연결은 차단되었고 고립되었으니 결과는 뻔하다. 굶어 죽기 전에 성의 바깥에서 조선 군대가 청나라 군대를 압도하고 임금을 구출해야 그 임금은 항복을 면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수어사가 40년 전 임진왜란 당시의 화약 무기 등을 잘 정비하고 수비군 병력과 지휘체계를 확립했다면, 적이 강성해도 수비에는 자신이 있었을 것이지만, 먹을 식량이 없었던 것이다.

행궁쪽 마을- 수어장대 아래 숲에서 내려다 봄

우리는 밑으로 계속 내려갔다.

“여보, 떡갈나무가 뭐야.”

아내가 나무에 매달아 놓은 이름표를 보고는 묻는다.

“어, 도토리나무 일종. 떡을 감쌀 정도로 이파리가 크고, 항균 작용도 한다 하네. 잘 쉬지 않는 거지.”

물푸레나무도 보였다. 친절하게도 이름표를 달고 설명하고 있다. 가지를 물에 담구면 물이 푸른색으로 변해 물푸레나무라고 한다고 적혀 있다. 이렇듯 나무 이름은 쓰임새나 어떤 연유에서 따온다. 때죽나무는 잎을 찧어 개울에 풀면 피라미 등 물고기가 죽어 떼로 떠오른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병자호란’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아내와 둘이 읽어 본다. ‘병자호란- 우리 민족의 삶을 바꾼 전쟁. 1636년 12월 말에서 1637년 2월까지, 조선과 청나라 간 벌어진 전쟁 …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가 승리하면서 동북아시아 패권을 거머쥐었다, 여파로 조선 내부에서는 실학을 태동시켰다, 등등 이야기하고 있다.

민족이라는 단어가 우선 거슬린다. 당시에 있지도 않는 개념이다. 조선은 왕조국가로 지배계층은 양반(문반-무반)으로 전체 인구의 10프로 정도이고, 피지배 계층은 평민과 관노비․사노비․백정․광대 등이라는 사실을 외면하는 허상일 뿐이다. 병자호란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오히려 왜곡하고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민주국가 2018년 현재에서 그렇다. 주권과 인권을 가진 시민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타당할 것인데 뜬구름을 잡고 있다. 심기가 불편해진다.

우리는 내리막으로 내려가다 산허리로 이어지는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칼을 쓴 예수 상’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예수 상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쓴 모습인데, 조선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직사각형 나무칼을 목에 쓰고 옥에 갇혔으니, 칼을 쓴 예수 상을 만들었다 한다.

산 밑에는 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응달이라 그런 것 같았다. 관목들은 별로 없고 느티나무, 잣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었다. 남문이 나타났다. 문루에 지하문이라고 한자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의 옆쪽에 옛날 모습이 담긴 사진과 사연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흰 옷을 입은 맨상투를 한 어른 서 너 명이 남문 앞에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모습이 찍혀 있다.

“어, 똥장군이다.”

아내가 말했다. 과연 지게에 원통형 똥장군이 얹혀 있다. 그 옆에 빈 지게도 보인다.

1893년에서 1894년 사이에 프랑스 공사가 남문 풍경을 찍은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니 수어장대에서도, 누각을 배경으로 중인 갓을 쓴 노인 두 명이 찍힌 옛 사진이 있었는데 그것도 프랑스 공사의 작품인 것 같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즈음의 경기도 광주 사람들, 몹시 지쳐보이고 깡마른 사람들이었다.

나는 남문 밖으로 나가 보았다. 문을 넘자 성남시 땅이었다. 느티나무 고목이 몇 그루 서있다. 수령은 600여 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본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십여 명 둘러 서있었다. 여자 가이드가 일본말로 뭐라 한다. ‘누르하치, 누르하치 하는 소리가 들린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아버지이자 후금 건국자를 말하고 있었다.

비석이 여러 기 늘어서 있는 앞으로 갔다. 그 중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백성들 후리치고 삥땅을 쳤겠지. 임기가 끝나면 송덕비라고 거창하게 세우고…”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아니, 당신은 과장이 심한 것 같아.”

“그럴까, 흐흐흐.”

하고 말았다.

겨울 설경이 바로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능선 길이 보이고, 아래로 뻗어 내려간 골짜기에 하얀 눈이 쌓여 있다. 생학이랑 숱하게 오르던 겨울 눈 산행이 떠올랐다.

“생학이가 살아 있다면 같이 이곳을 왔을 텐데…”

“…그래서 죽는 건 나쁜 거야. 살아 있어야지.”

아내가 분명하게 말했다. ‘아, 그래. 어떻든 살아 있어야지.’ 나는 말로 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산을 거의 다 내려가고 도로가 보이는 지점에, 비석을 수십 기 모아 놓은 게 보였다. 남한산성 내에 산재된 비석 30기를 행궁 복원공사 때 이곳에 모아 놓았다 한다.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군수 등의 선정을 기리고 고마움을 표하고자, 백성들이 정성을 모아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그 선정이 어떤 것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광주유수 등 선정비- 백성들이 고마움? 을 표하고자 세웠다는데…

남문 주차장 바로 옆 식당에서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산행을 세 시간 정도는 한 것 같았다. 아내는 힘이 들었는지 조금 지쳐 있었다. 나는 한우 소머리 국밥을, 아내는 산채 비빔밥을 시켰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맛있게 먹다가 ‘화냥년’이란 말이 화제에 올랐다.

“화냥년이란 말은 참 나쁜 말이야. 국가 책임을 희생당한 여자들에게 전가하고 말이야. 성차별 단어이기도 해. 없애 버려야 돼.”

아내가 분개한 듯 말했다.

“음…그렇지. 여보 그런데 말이야, 국가라고 통칭하면 곤란해. 임금과 양반들 책임이라고 해야지. 당시 포로가 10만 명이었나. 대부분 평민과 노비들이었겠지. 양반의 아내와 딸들도 있었겠지. 그 포로들은 청 태종과 부하 장수들의 재산이야. 몸값을 지급하고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양반들이야. 포로가 도망가다 잡히면 처음에는 발 뒤꿈치를 자르고 다음에는 한 쪽 다리를 자르고, 또 도망치면 죽였다고 하네. 옛 정을 못 잊어 데려온 아내와 정상적으로 부부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 정조가 더럽혀졌다 생각했겠고 결국 내쳤겠지. 자기 책임은 모르고 애꿎은 아내에게 전가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지.”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뭐라고 ‘화냥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이렇듯 병자호란은 400여 년 전의 사건이지만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었다. 작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죽임을 당한 사공의 어린 딸과 인조를 만나게 하고 있다. 인조가 자애로운 눈길로 신민을 바라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가당치 않는 설정이다. 그가 자전거 라이딩을 하며 숱하게 남한산성을 오갔다 하는데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식사 도중에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수어장대 쪽 적송 숲이 보였다. 행궁 근처 느티나무들도 보였다. 비루한 인간세계와는 동떨어져 그들은 자연 속에서 나름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필자소개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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