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 50대에 길을 잃다
    방황하는 또 다른 나에게의 편지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②
        2017년 12월 12일 09: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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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노조에 계시네요.”

    누군가 물었다.

    “입사가 언제예요?”

    “1989년입니다.”

    “‘늙은 노동자의 노래’ 가사에서 나오는 것처럼 ‘어언 30년’이네요.”

    또 다른 누군가 물었다.

    “어디 다니세요?”

    “한국GM에 다닙니다.”

    “귀족노조네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을 느꼈을 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전에는 수구·보수언론과 일부 집단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통 사람들의 입에서도 귀족노조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벌어지고,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됐기 때문이리라.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은 열심히 달려왔다. 그들도 귀족노조 소리나 들으려고, 단지 임금만 올리려고 그렇게 열심히 조직하고 투쟁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고용·임금·권리를 챙기기 위해 쏟은 힘과 열정에 비해 전체 노동자들의 그것을 위해서 쏟은 힘과 열정은 얼마나 될까? 우리 것만 챙기면서 그저 자기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우리만 달랑 앞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우리가 손을 잡아주지 못해서 뒤에 쳐진 수많은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에서 앞서가는 우리를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귀족노조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러한 비난에 대해 억울하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경청해야 한다고 본다. 수구·보수언론이나 일부 집단의 상투적인 비난은 단호하게 맞서든지 그냥 웃으며 흘려들으면 된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 특히 가난한 노동자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귀족노조라는 비난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뼈아픈 반성을 요구하는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 대한 비난은 민주노총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민주노총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을 대변하는, 귀족노조의 대변자라고 몰아세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과 높은 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 공무원 노동자, 교원 노동자가 민주노총의 주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노총은 최저임금 인상 등 저임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고 있고, 민주노총 조합원 중 상당수가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사실 자체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항변은 된다.

    하지만 1995년 11월 11일, 노동자들의 희망을 안고 출범했던 민주노총이 22년이 지난 지금 가난한 다수의 노동자들을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민주노총을 비판해야 하고, 그것도 뿌리에서부터 제대로 비판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민주노총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민주노총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길을 잃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길을 잃었다는 것은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의 장래,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장래가 불투명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그냥 그저 현상 유지는 될 수도 있다.

    절망감은 바로 현상 유지라는 단어에서 온다. 그것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민주노총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통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신의 것만 챙기고 있는 모습을 볼 때의 절망감이다. 그리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고통과 함께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내가 어찌하다 정규직이 되어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있고, 세상을 보다 평등하게 만드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자책에서 오는 절망감이다.

    그래서 나는 희망을 찾아 나서 보기로 했다. 노동조합도 없고, 하루하루의 삶을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흙수저 N포세대인 가난한 노동자들 속에 희망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이들이 스스로 조직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진정 세상은 바뀌기 시작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서도 희망을 찾기로 했다. 중요한 건 여전히 사람이다.

    전국에는 노동조합을 만들고, 민주노조를 세우고, 자본에 맞서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싸워왔던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다. 이들의 마음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다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앞이 잘 안 보인다. 우리 모두는 길을 잃었다. 나는 길을 잃은 또 다른 나, 하지만 길을 찾고자 하는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건네고 싶다. 뜨거웠던 투쟁의 기억들, 치열했던 삶의 흔적들을 그저 과거의 것으로 묻어 버리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픈 또 다른 나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 한다. 여전히 올곧게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있고,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다’는 신경림의 시구처럼, 힘겨운 노동을 끝내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착하디 착한 공장의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권력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모순이 있는 곳에 운동이 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고 할 일은 넘친다. 87년부터 줄기차게 외쳐왔던 ‘인간답게 살아보자’, ‘노동해방’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제안한다. 이 시대 넘쳐나는 ‘해야 할 일’을 함께 찾고 함께 실천하자고.

    “아빠, 그게 얼마 후 내 모습일지 몰라”

    헬조선.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한국 사회는 말 그대로 지옥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혼자 속으로 또는 서로에게 ‘우리는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다행’은 누군가의 ‘불행’과 연결돼 있으며, 불행한 이들의 수가 너무 많다.

    내가 2015~16년에 한국GM 노동조합 상집 간부로 일할 때 정규직 지부와 비정규직 지회가 공동으로 비정규직 실태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을 받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도 중소기업이나 다른 곳의 비정규직보다는 낫다는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말이다.

    추운 겨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난방 실태를 조사하면서 한국GM 안에는 두 부류의 노동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추우면 춥다고 말할 수 있는 노동자와 아무리 추워도 춥다고 말할 수 없는 노동자. 동일한 작업을 하는 정규직 공정의 실내 온도는 15~19도인데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 쓰러져 가는 천막에서 겨우 바람만 막은 채 0도의 추위에서 일하고 있었다. 추위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름이면 40도의 찜통더위에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땀에 젖은 몸을 씻을 샤워장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작업환경 실태 조사 활동을 함께 한 비정규직 지회의 간부는 이렇게 한탄한다. “내가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을 한 지 15년이 되었는데 활동을 헛한 것 같아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차별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니.”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지만 1차 비정규직 노동자인 그는 자신들보다 더 열악한 2, 3차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그냥 지나쳐 온 거다. 그렇다. 문제화되지 않은 문제는 없는 것이 된다. 매일 지나치면서도 관심을 갖고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엄청난 문제들이 보인다.

    한국GM 정규직 지부와 비정규직 지회는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GM 측에 난방 대책을 요구했고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난방 기구의 추가 비치와 간이휴게실 설치 등의 미봉책에 그쳤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GM의 2차 하청업체에 근무하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봉 3,0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으로 대학 다니는 아이를 포함해서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에 잔업, 특근을 최대한하고, 상여금을 합쳐야 간신히 3,000만 원을 넘길 수 있다. 내가 저 돈으로 우리 가정을 꾸려가야 한다고 상상을 해보았다. 마음이 아득해졌다. 정규직인 내 연봉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결혼식 하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같은 부서에서 일하던 비정규직 친구가 결혼했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부부 싸움을 대판 했단다. 이유를 들어보니 결혼할 때까지 이 친구가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이야기를 안 한 것이다. 부인이 느끼는 배신감이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친구가 느꼈던 수치심은 어땠을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인에게마저도 죄인처럼 고개 숙이고 살아야 한다. 일은 정규직과 똑같이 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당당하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게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다. 이후 이 친구는 다행히 정규직으로 발탁 채용이 되었지만 한국GM에는 아직도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런 수모를 겪으며 살아간다.

    잊히지 않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약간은 말이 많고 풍채 좋은 아주머니가 계셨다. 공장이 주간만 돌아가다 생산 물량이 늘어나면서 주야간 교대 작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야간 정상근무는 새벽 5시 30분 종료, 30분 식사, 2시간 잔업 후 아침 8시 퇴근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인 이분에게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남편은 직장이 멀어 새벽에 출근해야 한다. 아주머니는 관리자에게 사정했다.

    “저, 야간 때만 잔업 빠지면 안 돼요? 아이를 챙겨 주려면 일찍 들어가야 해서요.”

    관리자에게서 돌아온 대답.

    “그러려면 그만둬! 여기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쌔고 쌨어!”

    그 다음날부터 그 아주머니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야! 그 뚱뚱하고 말 많은 아줌마 짤렸대.”

    비정규직 지회의 한 조합원이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좀 나은 편이예요. 공장 밖에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취준생인 큰딸에게 한국GM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태를 이야기해 주었다. 내 말을 들은 큰딸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한다.

    “아빠, 그게 얼마 후 내 모습일지도 몰라.”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단한 삶에 청년들의 절망이 겹쳐진다. ‘노동운동이 절실한 곳, 조직과 투쟁이 절실한 곳은 바로 여기다’라고 생각했다. 한국GM 정규직 노조는 조합원 1만4,000명의 막강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지만, 부평공장 비정규직 지회 조합원은 두 자리 수에 불과하다.

    자신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동조합이 절실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지만 그들에게는 노조가 없다. 한국 사회 1,900만 노동자 중에서 조직률 10%로 190만여 명만이 노동조합 조합원이다. 게다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다. 그렇다면 조직되지 못한 90%의 노동자, 1700만 명의 노동자는 과연 누구인가?

    한국지엠 창원 비정규직 지회의 1일 고용노동부 창원지청 앞 총고용보장, 특별근로감독 촉구 집회(사진=한국지엠 창원 비정규직지회)

    어긋남, 그리고 노동운동의 보수화

    내가 오래전 노동자로 살겠다며 공장에 들어갔을 때, 나를 잘 알던 지인들이 처음에는 미안해하고 격려도 하고 지원도 해 주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힘들지?”

    몇 년 후 수많았던 위장 취업자들이 썰물처럼 공장을 빠져나가던 시기 그들은 나를 보면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그리고 또 수년이 흘렀다. 그들은 말했다.

    “너 살만 하지?”

    이제 그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시선을 내게 던지며 이렇게 말한다.

    “넌 좋겠다. 연봉도 높고, 정년도 있고……”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어떠한 어려움과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어찌하다 보니 나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는 50대 중년이 돼 있었다. 대우자동차 들어와서 해고 두 번, 구속 두 번, 속된 말로 신세 조질 만한 상황인데 조지기는커녕 잘 먹고 잘 산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우리 사회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와 고스란히 맞닿아 있을 것이다.

    87년 이전만 해도 한국 노동자들은 모두 가난했다. 한국GM의 선배들에게 87년 이전에 받았던 임금 수준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배들의 임금 수준은 내가 대우자동차에 입사하기 전에 다니던 마찌꼬바의 경력 노동자들보다 낮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고, 모든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함께 싸웠다. 대기업 노동자 임금이 오르면 중소기업 노동자 임금도 올랐다.

    이때 모든 노동자들은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를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연대도 열심히 했다. 대우자동차 젊은 노동자들은 지역 중소기업 노조 파업 때 구사대에 맞서 파업 사수대로 공장을 지켜 주었고, 지역 노동자들은 대우자동차가 파업을 하면 열심히 지지하고 응원해 주었다. 대우자동차 선배 노동자들 가운데 인천 지역 투쟁 사업장 여성 노동자들과 결혼한 사례가 꽤 있다. 당시 활발했던 연대 투쟁의 증거다.

    정권과 자본의 탄압도 공평했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이 공안정국을 선포한 이래 정권과 자본은 대기업, 중소기업을 막론하고 모든 노동자들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서 폭력 집단 구사대가 등장했고, 대규모 경찰력 투입이 빈발했다. 헬기가 뜨고, 수천에서 만여 명에 이르는 경찰을 동원해서 파업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당시는 또 해고와 구속의 시대였다. 감옥은 노동자들로 가득 찼고 거리에는 해고자들이 넘쳐났다. 나도 1992년에 위장 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해고됐다. 당시 대우자동차에만 대략 40~50명의 해고자들이 있었고 전국적으로는 그 수가 1,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는 전투적이고 영웅적인 투쟁의 시기였다. 노동자들은 단결된 투쟁으로 정권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분쇄했다. 노동자들은 전노협을, 민주노총을 건설했다. 전국의 노동자들은 대기업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이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노동해방으로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될 것으로 믿었다. 당시엔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임금이 오르긴 했지만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지불 능력이 있는 대우자동차 같은 수출 중심 대기업 임금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주변에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소기업들, 그리고 노동집약적인 소비재 중심의 대기업들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외국인 노동자들로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고용 기반이 무너져 내렸다.

    옛날에는 부평 대우자동차 주변에 공장들이 참 많았다. 지금 서문 건너편에는 동양철관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임금 인상 투쟁 시기가 되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과 동양철관 노동자들은 서로 함성을 지르며 응원하곤 했다. 이제 그 회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남문 건너편에 있던 전남방직 기숙사에서 젊은 여성 노동자들이 퇴근하는 우리를 향해 손도 흔들어 주곤 했는데 그 자리에도 아파트가 들어섰다. 삼익악기, 영창악기 등 많은 중견 기업들도 문을 닫거나 외국인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함께 만들어 내고 전노협, 민주노총을 함께 만들었던 노동자들이 어디론가 흩어지고, 노동조합도 간판을 내리기 시작했다.

    더 잘 싸워서 노동조합이 유지되고 더 못 싸워서 노동조합이 문을 닫은 것은 아니다. 단지 지불 능력이 있는 수출 대기업에 다닌다는 것과 해외 이전과 구조조정이라는 자본의 칼날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차이일 뿐이다. 공장이 문을 닫는데 노동조합을 지켜낼 재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IMF 구제금융 사태와 정리 해고 국면을 겪으면서 그 어긋남은 결정적 현상이 됐다.

    이전에는 임금이 많이 오르고 적게 오르는 정도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노동자 내부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는 구조 문제가 되었다. 주변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어 우리 곁을 떠났지만 전체 노동자들의 수는 오히려 늘었다. 그들은 서비스, 정보산업의 노동자로,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어긋남이다.

    첫 번째 어긋남은 힘이 절실한 곳에는 힘이 없고, 힘이 있는 곳의 힘은 그것이 절실한 곳에 쓰이지 못하는 현실이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조합이 절실한 가난한 다수 노동자들은 쉽게 조직되기 힘들다. 조직 활동가를 비롯한 역사적으로 축적된 힘과 활동 경험이 부족하다. 반면에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는 조직력, 자금력, 투쟁 경험, 활동가 등 축적된 힘과 경험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힘들이 자신들만의 이해를 위해서 사용되고,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서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

    둘째로 가장 고통 받는 다수의 가난한 노동자들을 지향해야 한다는 노동운동의 당위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의 이해를 중심으로 맴돌고 있는 노동운동 현실 사이 어긋남이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투쟁과 미조직 노동자 조직 사업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투쟁과 사업을 배치하고 실천한다. 하지만 민주노총 조합원의 다수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힘이 제대로 받쳐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투쟁과 사업이 힘 있게 진행되지 못한다. 그래서 구호와 목소리는 시끄럽고 크지만 실제로 동원되는 힘과 성과는 작다. 구호와 실제의 어긋남이다.

    셋째로 수적으로 다수이면서 고통과 분노를 품고 있는 잠재적인 주체와 실제로 조직되어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적인 조직 주체 간의 어긋남이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수적으로 다수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사회 현실 때문에 가장 고통 받고 있고,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고픈 욕망이 크다. 따라서 사회의 근본 변화를 열망하는 혁명적 잠재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조직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의 불만과 욕망이 일관되고 지속적인 힘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반면에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갖고 있지만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이미 획득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성이 강해지고 있다. 또한 자신의 힘을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경향성도 심해지고 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함께 손을 맞잡고 싸웠던 노동자, 노동조합이 옆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에 둔감했다. 주변이 허물어져 가고 몇몇 대기업들만이 섬처럼 살아남은 거다. 우리가 앞에 보이는 정권과 자본과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자본 운동은 우리 주변과 발밑을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와 산업구조 전반과 노동자 계급의 구성, 고용 관행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그 결과 어긋남과 균열의 모습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조직되어 있는 안과 조직되지 못한 밖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 안은 이념과 정신이 무너져 내리고, 밖은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긋남 때문이다. 어긋남은 나를 포함해서 세상을 바꿔 보겠다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은 수많은 활동가들에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빼앗고 혼란과 고통에 빠지게 만든다. 이 ‘어긋남의 현실’을 우리가 정면에서 직시해야 할 때다.(계속)

    필자소개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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