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전 오키나와 도시,
    슈리와 나하, 나하와 슈리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류큐왕국
        2017년 12월 05일 10:0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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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나와는 관광지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지역이지만, 미군기지로 대표되는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키나와의 중심도시인 나하에는 전쟁과 관련된 유적이 많지는 않지만, 미군의 공습으로 시가지가 파괴되어 재건된 도시라는 점에서 방문해 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도시라는 관점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지금의 나하시는 나하, 슈리 등 몇 개의 도시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는 점, 나하의 가장 번화가인 국제거리가 전후에 만들어진 거리라는 점 등 또한 주목해볼만 하다. 전전의 오키나와는, 나하시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하시와 슈리성은 어떤 관계였을까. ‘오키나와’가 아니라 ‘류큐’였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류큐왕국에서 오키나와현으로

    오키나와 지역은 예전에 류큐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오키나와가 일본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2세기로,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아지(按司)라는 이름의 호족들이 세력을 다투었다.

    14세기 중반이 되면 오키나와 섬에는 난잔(南山) ․ 쥬잔(中山) ․ 호쿠잔(北山) 등 3국이 성립했다(산잔시대三山時代). 이때 쥬잔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진공무역(進貢貿易)이 시작되어(1372년), 50년도 되지 않는 산잔시대 동안 3국에서 70회가 넘는 진공선을 보내기도 하였다. 오키나와 일대의 가장 유력한 경제수단이 중국을 비롯한 일본 ․ 조선 등과의 중개무역이었던 만큼 진공무역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알 수 있는 한편, 조공의 횟수를 통해 3국의 세력 차이를 가늠해볼 수 있기도 하다(쥬잔 42회, 난잔 24회, 호쿠잔 11회).

    류큐왕국이 탄생한 시기는 15세기 초로, 쇼하시(尙巴志)가 쥬잔을 시작으로 호쿠잔 ․ 난잔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통일왕조를 건립했다. 쇼하시는 쥬잔의 성이 있었던 우라소에(浦添)가 아닌 현재의 슈리성(首里城)을 증축 ․ 확장하여 왕성으로 삼았다. 슈리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류큐왕국의 왕도가 되면서 전반적인 보수와 주변 정비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류큐왕국의 궁전 슈리성

    한편, 나하 일대는 슈리의 문호(門戶)역할을 하는 항구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류큐왕국이 무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기에 나하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류큐왕국의 경제적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하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우치마 가나마루(內間金丸)을 들 수 있는데, 가나마루는 쇼씨(尙氏) 왕조의 왕자인 쇼타이큐(尙泰久)를 섬기면서 중앙에 진출했고, 나하 세력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가나마루는 자신을 쇼엔(尙円)이라 칭하면서, 이른바 제2쇼씨 왕조가 시작되었다.

    류큐왕국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1609년으로, 사츠마번의 침략으로 류큐왕국이 막번체제(幕藩體制)로 편입된 것이다. 사츠마번이 류큐왕국을 침략한 것은 류큐왕국이 가지고 있던 대명 무역 등을 통한 경제적 이권을 빼앗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류큐왕국을 통해 명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지만 류큐왕국이 이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류큐왕국은 실질적으로 시미즈번에 점령되었고 쇼씨는 시마즈씨의 가신으로 지위가 전락했지만, 시마즈번은 류큐왕국과 중국의 무역을 유지하기 위해 겉으로는 류큐왕국을 유지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중국과의 진공무역은 류큐왕국에 경제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시마즈번은 진공무역에서 나는 이익이나 오키나와의 특산물 중 하나인 설탕 등의 특산물을 매우 싼 가격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류큐를 형식적이지만 독립국으로 두는 것보다 자국으로 편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872년 류큐국을 류큐번으로, 류큐국왕을 류큐번왕으로 격하하는 조취를 취했다. 또한 태풍을 만나 조난된 미야코지마 주민들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되자 일본은 청에 대만 원주민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했고, 청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대만으로 출병하였다(1874년). 이후 일본의 출병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청이 인정하게 하면서, 류큐가 일본 영토의 일부라고 인정케 하였다. 그리고 1879년 내무대승(內務大丞) 마츠다 미치유키(松田道之)를 류큐로 파견해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하였다(폐번치현).

    폐번치현 이후 일본 메이지 정부는 류큐를 아홉 개 행정구(行政區)로 나누고 각 행정구에 새로운 행정기구를 설치하였고, 기존에 있던 행정기구들은 그대로 남아 각 행정구역소의 감독 하에 두었다. 이 때 나눠진 행정구역은 首里 ․ 那覇 ․ 島尻 ․ 中頭 ․ 國頭 ․ 伊江島 ․ 久米島 ․ 宮古 ․ 八重山 등으로, 슈리성의 무역항이었던 나하 지역이 슈리와 동등한 하나의 구(區)가 된 것이다. 또한 새로운 현청(縣廳)을 슈리성의 한 전각에 둘 것인지 나하에 새로운 청사를 지을 것인지의 두 가지 선택지 중 후자가 선택되면서, 행정의 중심지가 슈리에서 나하로 이동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슈리성 일대가 나하에 흡수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슈리와 나하의 관계가 역전된 것은 사실이었다.

    지방자치의 지연(遲延)과 도시계획

    나하와 슈리는 일본의 다른 지방도시들보다 도시계획법의 적용이 매우 늦은 편이었다. 도시계획법이 1919년 제정된 이후부터 일본의 지방도시에 서서히 적용되었다면, 나하와 슈리에는 도시계획법이 1933년이 되어서야 적용되었다.

    나하와 슈리에 도시계획법 적용이 지연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지방도시들은 국가차원의 도시계획이 시작되기 전부터 자치사무로서 도시개조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도시계획법 적용이 지연되었다는 것은 곧 자치사무로서의 도시개조 경험 또한 늦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하와 슈리에서 지방자치 시행이 늦어진 원인은 오키나와현이 설치되면서 기존의 제도나 관행 등이 없어지지 않고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오키나와의 근대를 시기구분 해 보면, 폐번치현 이후 1896년 구제(區制)가 실시될 때까지의 시기를 구습온존기(舊習溫存期, 구습답습기라고도 부른다)로 본다. 말 그대로 류큐왕국 당시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는 뜻으로, 이는 곧 류큐왕국 시기의 지배층이나 자산가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세력이나 영향력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의 능력만으로 기득권을 지킨 것은 아니었다. 일본정부가 오키나와의 폐번치현 당시 구습을 그대로 유지해야 했던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정부는 오키나와의 주력 상품인 설탕을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생산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이를 위해 기존의 통치구조와 인적 구성을 변화시키지 않고 유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를 유지하였다는 것은, 사츠마번의 침략 이후 설탕을 전매하는 방식으로 이득을 취하는 제도 또한 유지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제도는 기술의 개량, 세금제도 개선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농민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농민들은 설탕뿐만 아니라 토지분할이나 말단행정기구 등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농민들 사이에서 구습폐지운동이 일어나거나 자체적으로 대표를 뽑아 상경하여 의회에 청원하기도 하였다.

    나하와 슈리에 지방자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1년 시제(市制)가 실시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까지 지방자치 차원에서의 도시개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예비적인 차원의 사건은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10년 제기된「공유수면매립문제」를 들 수 있다. 나하항에 매립항을 만들기 위해 1907년부터 예산이 계상되어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오키나와현은 항구 매립과 더불어 항구와 만나는 주요 간선도로의 개수 또한 진행하였다.

    그런데 한편으로 나하구에서는 나하항에서 츠보가와(壺川)에 걸친 내해(內海) 공유지를 매립해 공유시설용지를 확보하고 나머지 토지는 불하하여 구의 재원으로 삼는 매립사업을 구영(區營)으로 진행하고자 한다는 출원서(出願書) 오키나와현에 제출하였다. 하지만 현에서는 부에서 진행하는 매립사업에 필요한 계획만 예산에 편입시켰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하구와 구회의원은 구민대회를 열어 현과 지사(知事)을 비판하였다. 이 문제는 내무성에서 나하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현의 사업만을 허가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지방자치 차원에서의 도시개조에 대한 일종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나하구전도(那覇區全圖)
    출처 : 那覇区役所, 那覇區全圖, 1915(沖縄県立図書館 貴重資料デジタル書庫)

    슈리시가도(首里市地圖)
    출처 : 原賀 技手, 首里市地図, 1925(沖縄県立図書館 貴重資料デジタル書庫)

    「대오키나와(大沖繩)건설」과 슈리 ․ 나하의 합병

    1933년 슈리와 나하에 도시계획법이 적용되었지만, 두 도시에서 진행된 도시계획사업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행된 하수도사업밖에 없다. 오키나와현 지사를 회장으로 하는 도시계획 오키나와지방위원회는 37년을 시작으로 3번 밖에 열리지 않았고, 내무성 직원록에 도시계획 오키나와지방위원회 내용이 없는 등 내무성에서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 가지 구상되었던 도시계획사업이 시촌합병(市村合倂)으로 대표되는「대나하시(大那覇市)건설」계획이었다. 이는 1932년 당시 나하시장이 잡지 기사에서 언급한 것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본격적인 논의는 1939년 5월 풍치지구지정의 지도를 위해 오키나와현을 방문한 내무성 계획국 기사 기타무라(北村德太郞)의 언동이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기타무라는 방문 당시 슈리와 나하의 도시계획이 별도로 계획되어 있는데, 두 도시를 일괄하여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슈리시장이 나하시장을 방문해 슈리와 나하의 합병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서야「대나하시(大那覇市)건설」계획이「대오키나와(大沖繩)건설」로 이름을 바꾸어 공표되었다. 주된 내용은 나하시, 슈리시와 그 인접한 촌인 오로쿠(小錄) ․ 도미구스쿠(豊見城) ․ 마와시(眞和志)를 합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대오키나와(大沖繩)건설」계획은, 계획안만 봤을 때는 도시계획사업으로서 일반적인 방침에 그치고 있으며, 용도지역 외의 지역지정을 당면의 목표로 두었다. 또한 실제로 용도지역지정을 시도한 흔적도 없으며, 나하의 상부인 오키나와현이나 내무성으로 계획안이 상신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실행되지 않고 계획으로만 존재했던 것이다.

    이 계획이 가진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나하와 슈리의 도시계획구역이 각각 지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인접한 두 지역의 도시계획을 굳이 따로 설정한 것은 도시계획법에서 규정한 도시계획구역의 정의와도 맞지 않는다.「대오키나와(大沖繩)건설」계획을 구상한 기타무라가 이를 지적하지 않고 방치한 이유 또한 명확하지 않다.

    이유를 추측하기 위해「대오키나와(大沖繩)건설」의 핵심인 시촌합병을 좀 더 살펴보자. 도시계획에서 구역을 설정하는 것이 여러 지자체에 걸쳐서 지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것이 행정구역 전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 즉 어떤 행정구역은 일부만이 구역설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대오키나와(大沖繩)건설」계획에서 구역설정을 곧 시촌합병으로 받아들인 것에 의문이 생겨난다. 이를 도시계획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1910년에 일어난 「공유수면매립문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키나와에서도 지자체 차원의 도시개조는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도시계획법 적용 이후에도 지자체별로 도시개조에 대한 의지는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오키나와현의 도시계획위원회 활동이 미약했고, 내무성의 감독과 내무대신 ․ 각의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도시계획은 나하나 슈리의 위정자에게는 겪어보지 못한 번거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시계획 구역설정과는 관계없는 지자체의 합병을 도시계획이라 생각하고, 이에 지방자치의 기반으로서 시역 확장을 우선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게다가 오키나와현은 도시계획을 진행할 전문가도 부족했고 도시계획 이전부터 국고보조를 받는 오키나와진흥사업이 있었기 때문에, 국고보조도 없는 도시계획사업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하가 도시계획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미군의 공습으로 시가지가 파괴된 이후였다. 오키나와 현지 신문에서는 계획만 세울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겨야 한다며 기존의 도시계획에 대해 비판했고, 공습을 받을 당시부터 부흥계획(復興計劃)을 세우고 있었던 내무성 국토국계획과는 계획의 주안점을 토지구획정리를 통한 도로용지의 무상취득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전후 오키나와의 부흥은 미군에 의해 진행되었고, 이때 비로소 나하 ․ 슈리 ․ 마와시 ․ 오로쿠가 합병되어 나하시가 되었다.

    <참고문헌>

    那覇市企画部市史編集室 編,『那覇市史』通史篇 第2券 近代史, 1974.

    김백영,「오키나와 도시공간의 문화적 혼종성 – 나하시 국제거리의 역사성과 장소성」,『경계의 섬, 오키나와』, 논형, 2008.

    伊從 勉,「市村合併という〈都市計画〉-首里・那覇の近代自治と官製都市計画の遅延」,『人文學報』104, 2013.

    필자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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