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과 과학, 분리되어야
    [종교와 사회] 종교개혁 500주년
        2017년 10월 11일 0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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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까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임명 문제가 한동안 많은 뉴스를 차지했었다. 개신교인 박성진 내정자가 결국 자진 사퇴하는 것으로 뉴스의 막은 내렸지만, 영 찜찜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개신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개신교에 대한 안 좋은 뉴스들이 심심치 않게 뉴스를 장식하는 것을 보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다. 보편타당성이 있어야 하는 종교와 종교인들이 가끔 상식과도 먼 사고를 하는 것 같아서, 도대체 종교는 무엇인가를 자꾸 생각하게 된다.

    종교를 통해 사람이 더욱 합리적이 되고, 과학적 사고를 하게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종교로 인해 주변 사람은 물론, 사회 속에서 건전한 대화적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으로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 종교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장관 내정자는 자기가 믿는 창조신앙에 의하면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했다. 지구의 나이가 수 십 억년 이라는 일반 과학계의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매년 10월이 되면 개신교에서는 큰 행사들이 열린다. “종교개혁 기념의 달”이라는 이름으로 중세 유럽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왜곡된 신앙체계로부터의 개혁운동을 기념하는 예배와 행사들로 수없이 많은 교회와 개신교 모임들이 열릴 예정이다.

    마르틴 루터 등으로 인한 15,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는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가 희망봉을 발견하였고, 콜럼버스(Columbus)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에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시기였다. 나아가 현미경, 나침반, 시계, 화약, 인쇄술 등 과학기술 문명이 본격적으로 발전되는 시대이기도 했다.

    종교개혁 운동은 이런 시대에 진리 추구에 있어서 실험과 경험정신을 과학정신에 더욱 깊이 불어 넣었다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진리는 자기 비판적 실험을 통해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종교개혁 정신이었다. 의심의 해석학을 통한 진리추구 정신은 곧 실험의 결과를 통해 누적된 사실로 발전되는 과학정신의 기초가 되었고, 종교개혁과 더불어 유럽의 과학기술은 세계를 선점하게 된 것이다.

    종교신앙과 과학은 분리되어야지, 신앙이 과학이 되거나 과학이 신앙이 되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거나 자연만물과 사람을 창조했다는 기독교 신앙의 창조론 신앙은 종교적 진리 추구의 비판적 내적 실험을 통한 자기 체험과 경험에서 나오는 개인적 증거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기독교 밖의 합리적 과학적 사실 증거의 사회에서 종교적 창조론을 과학이라고 하면서 종교경전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고 하는 것은 신앙과 과학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그랬듯이 장관 내정자는 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를 믿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에 의한 세상의 창조, 곧 창조론을 과학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미국 국립과학원은 기독교의 창조과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사이비 과학이라는 말이다. 박성진 내정자는 졸지에 사이비 과학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과학자가 돼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은 창조과학자가 중소벤처기업부의 수장이 된다면 얼마나 이해 못할 일들이 발생했을 것인지, 자진 사퇴하기를 잘했다 생각된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유일신을 믿고, 유일한 경전(성서)만을 신봉하고, 유일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안팎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종교개혁의 참 정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또는 왜곡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나는 중세 종교개혁의 정신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주체적 자유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중세 가톨릭 교회의 틀에 박히고 교리체계와 억압적 교권의 지배구조, 탐욕적 부패 종교정치에 대해 ‘아니오’ 하고 외치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주체적 자유정신’으로 항거한 것이 종교개혁 운동 아니겠는가. 그래서 탄생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지 않는가. 주체적 자유정신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개신교인이라 할 수 있다.

    천재적 수학자요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이러한 종교개혁 정신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며, 위대한 교육운동과 해방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혁명적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신학, 철학, 역사학, 법학 그리고 정치학에 장기간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며 초기 근대 대학들이 설립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개혁운동을 시작했던 독일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는 나중에 시민화된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고, 새로운 종교문화의 출발지가 되었다. 당시 수천명의 학생들이 비텐베르크로 몰려와 학문을 연구하고 창조적 예술 운동을 펼쳤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한 혁명적 운동의 정신적 기초는 역시, 당시 가톨릭 교회의 관념적 교조적 형이상학적 성서해석에 대해 실존적 의문을 던졌던, 예수의 자유케 하는 기독교 복음에 대한 실제적 경험적 진리 체험의 정신이었다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주체적 자유정신’이라 하고 싶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운동은 당시 마음대로 자기 생각을 말 할 수 없었던 암울한 종교억압의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 정치, 문화, 사회문제 등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 할 수 있는 토론 문화를 만들었다. 이런 자유로운 토론 문화는 개신교회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해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하고 사회에 적용시킬 수 있는 예배의식 문화를 만들었음은 물론, 서구의 인문학과 자연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는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다. 장로교, 감리교, 루터교, 침례교, 순복음, 성공회 등등 나누어지게 된 동기도 역시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성서와 신학의 자유로운 연구운동으로 발전되어 각기 독특한 신앙적, 신학적 색깔을 자랑하면 형성되게 된 것이다. 박성진 내정자가 주장하는 창조론 신앙에 근거한 지구 나이 6000년이라는 것도 결국은 종교개혁의 자유로운 토론문화 정신을 무시하는 왜곡된 근본주의적 성서 연구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의 역사를 부끄럽게 하는 오늘 한국 개신교의 여러 얼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한편, 얼마 전 여기저기에서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은 향후 1년의 중요한 계획들을 결정하는 총회 행사들을 치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여러 가지 적폐들을 없애는 개혁적인 교회의 미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데 과연 그랬는지 의문스러운 일들이 생겼다. 대개 모든 교단들이 동생애자에 대한 철저한 반대운동들을 결의한 것이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500년 전 중세 암흑시대 속에서도 사람들이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적 방향을 결정했던 것과는 달리, 순식간의 짧은 시간에 적절한 토론도 없이 무차별적인 동성애에 대한 혐오심을 노출한 것이다. 500년 전의 사람들보다 못한 21세기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사람은 발전하고 진화하는 것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고, 병자와 죄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해 우선적 동정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예수의 정신은 온 데 간 데 없이 차별과 배제의 언어만 난무한 개신교의 부끄러운 민낯을 다시 보인 것이다.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가 때로는 적폐 청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필자소개
    목사. 거창 씨알평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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