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수정동: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
    [아트 살롱] 산책, 사람의 삶과 기억
        2017년 02월 21일 11: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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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주에 기반을 둔 기동성의 사회 속을 산책한다는 것은 속도에서 이탈하는 것이며, 유용성이나 실용성서 끊어지는 것이며, 목적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산책은 자본의 측면에서 보면 쓸 데 없이 불온한 방황(meandering)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걷는 것 자체가 목적(go for a walk)인 자기목적 행위다.

    산책할 때, 전혀 다른 감각과 전혀 다른 생각이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터. 질주경은 풍경이 되고, 후각이 회복되며, 귀와 몸을 때리던 바람은 잊힌 소리와 감각을 돌려준다. 또한 산책은 우리를 잊힌 과거의 파편으로 순식간에 되돌리며, 과거와 미래를 견주는 현재의 긴장 속에 우리를 남겨둔다.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정신의 팽팽한 긴장을 뚝 끊어야 비로소 물 속 머리칼처럼 한들거릴 수 있는 기억과 감각의 순례.

    걷다보니 수많은 사적 기억들이 소환된다. 지인을 통해 본 철거된 초량의 어느 집 사진 하나로 이미 울컥했던 터였다. 빈방 벽에 예쁘게 접힌 색종이 사진. 그러나 그 사진이 있는 집은 곧 철거될 예정이었다. 지금은 부재하지만, 이전에 저 방을 가득 채웠을 삶과 이야기. 사진 속 색종이가 그 기억을 든든히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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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내 아버지였음 좋겠다고 생각했던 분이 있었다. 폭력적이고 무뚝뚝한 아버지보다 늘 웃으며 말을 걸어주시던 아저씨, 주말에 목욕하러 가면,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서 서로 얘기를 주고받다가도 혼자 온 내 등을 밀어주시던. 그런 아저씨가 내연녀를 목 졸라 살해하고 감옥에 간 뒤, 피해자 가족의 협박에 남은 가족이 야반도주했고, 그 어지러운 빈방을 혼자 청소했어야 했던 기억과 저 색종이의 이미지가 겹친다. 서둘러 이사 간 흔적이 역력했던 빈 방 바닥에 딸아이가 엄마를 위로하며 남긴 편지가 떨어져 있었다. 혼자 청소를 하며 그 편지를 펼쳐서 읽었던 어느 일요일 오전 기억이 신책하는 동안 밀려온다. 수정동 산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권명희 씨라는 분이 계셨다. 기륭전자의 비정규직 사원이‘었’다. 문득 그 분도 아마 이런 길 어딘가에 살고 계셨을 것 같다는 생각. 기륭전자의 간부들을 인터뷰한 영상에서 정작 간부들은 회사 앞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도 모른다며 떳떳하게 너스레 떨던 장면이 생각난다. 기륭에서 해고된 일상인들은 간부들의 말을 통해 자신의 흔적조차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기억되지 않는 것을 존재의 미덕(?)으로 여겨야 하는 비정규직. 서러움이 운명이 된 삶. 권명희 씨의 죽음은 미디어에서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못해 기억 밖으로 밀려난 파편이 되었다. 죽음으로 호소해도 아무도 그 호소조차 감지하지 못하던 은폐된 현실. 존재조차 없었던 것으로 취급되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던 그 현장을 빠져나와 상한 몸을 뉘던 곳이 우리가 걷고 있는 일상이지 싶었다. 가까이 다가간 일상은 그리 유쾌한 기억만 있는 건 아니다. 천천히 걷는 동안 내 기억도 파도치듯 들고나기 시작했다.

    낯선 곳을 걷는다는 것은 느닷없는 경험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느닷없음은 도심 한 가운데, 그것도 주차장을 덮는 지붕에 커다란 다래가 열려 있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며, 거대한 나무가 집을 뚫고 들어가서 나무와 집이, 돌과 목재가 얽혀서 공존하고 있는 기묘한 집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걷던 길이 대부분 옛 물길이었다는 것, 주차나 차량 이동에 방해가 되더라도, 집의 축대에 바위 두 개쯤은 삐죽 튀어나와야 한다는 비상한 감각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절의 벽화에 산수가 그려져 있고, 담 아래 축대와 만나는 곳에 돌이 튀어나온 채 벽의 산수화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도록 남겨둔 느닷없는 풍경, 그리고 그 틈을 삐집고 나온 자생초들이 그림과 바위와 어우러지는 느닷없음는 쾌락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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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주차장의 참다래/집과 나무가 얽힘 /바위가 튀어나온 축대/절의 산수화와 바위

    이런 경험은 장소에 대한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지나가던 할머니와의 만남 덕에 일행은 할머니가 사시는 집인 국일아파트 내부를 볼 수 있었고, 거기서 수정과 초량의 전경, 심지어 부산항 전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골목을 매개로 주민과 방문객들이 만날 수 있는 골목콘서트가 이어졌다. 낯선 이에 대한 위험을 뒤로하고 실낱같이 이어지던 골목의 인연이 골목에서 실전화기로 전해지던 소리 같다.

    왼쪽 위 시계방향 국일아파트내부/ 국일아파트앞 전경 /실전화와 골목소리/골목 콘서트

    왼쪽 위 시계방향 국일아파트내부/ 국일아파트앞 전경 /실전화와 골목소리/골목 콘서트

    화이트 큐브의 전시와 달리 일상 자체가 전시가 된 산책. 마치 아무것도 작업하지 않은 듯하지만, 꽤 묵직한 사전 작업이 있었음을. 그 사전 작업이라는 게 두꺼운 시간의 먼지를 걷어내는 작업이었음을. 오래된 먼지를 닦아내고 드러난 반짝이는 표면. 이 무위(無爲) 같은 인위(人爲)는 한 때 시끄러웠던 단색화의 인위를 충분히 넘어서는 일상의 저력을 드러냈다. 부재하는 듯 존재하는 일상의 관성, 무의미한 줄 알았던 일상의 의미들이 산책을 통해 되살아났다. 부재한 줄 알았던 것이 존재로 전환되는 순간, 신비와 경이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마치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그림을 통해 존재를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장 노동자가 연출한 건물의 미적 감수성들이 경쟁하던 골목길, 축대를 휘감던 담쟁이 넝쿨들, 독수리와 시계로 현관 바깥을 장식해두던 집들, 그 집들 사이로 만들어진 골목, 예전의 물길을 여전히 증언하던 골목의 물소리, 도시의 소음이 일시에 차단되던 기묘한 공간을 걸으며, “이런 행사가 아니면 내가 언제 이곳을 지나다닐 수 있었을까.”를 반복적으로 되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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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책을 마칠 즈음, 대대적 철거가 이루어지고 있던 초량 일맥문화재단 입구에 도착했다. 개발이라는 파국으로 얼룩진 자본의 세계 앞에서 산책의 흥취는 금방 색이 바랬다. 산책 초기의 기억이 다시 귀환한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던 채플린의 말도 같이 귀환한다. 관조자의 무례를 주의하면서도 개발을 빙자한 철거의 무심한 파괴를 경계하던 수정동 골목의 기억은 주거가 시장이 된 장소로 불시착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경제 폭탄이 된 주거, 그럼에도 어떤 사람은 그런 폭탄조차 없어 애타고 절망하는 일상. 겨우 200년 남짓한 역사를 지닌 자본주의 시장 논리가 저지른 일이다. 부산에만 100여건이 넘는 재개발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곧 무수한 사람의 삶과 기억이 깡그리 철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산책은 계속되어야 한다. 가로지르기와 파열, 느닷없는 경험과 예측불가능한 만남으로 재편된 감각, 철거된 기억의 복원과 보존, 도래할 가능성을 열기 위해도…….

    필자소개
    비아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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