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수가 현실 안주할 때
    미래에 도전하는 사람들
    [왼쪽에서 본 F1] 니코 훌켄버그
        2016년 10월 20일 10:4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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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몇몇 프로 스포츠가 그렇듯, F1에서도 가을은 ‘드라이버 이적 시장’에 모든 관계자의 관심이 집중되는 계절입니다. 올여름까지만 하더라도 2017시즌을 앞둔 드라이버 이적 시장은 상당히 정체되는 양상을 보여줬지만, F1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 펠리페 마싸가 은퇴를 선언하고 최고참 드라이버 젠슨 버튼이 안식년을 갖기로 하면서 시장의 온도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드라이버 이적 시장의 격동이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바로 포스인디아 소속의 니코 훌켄버그가 네 시즌 동안 활약했던 중견 팀 포스인디아를 떠나, 2016시즌 기준으로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르노로의 이적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 중견 F1 팀의 시트에 빈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를 다른 팀의 드라이버가 그 자리를 채우는 도미노 현상이 불가피해졌습니다.

    일단 F1 드라이버의 이적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적이 좋은 드라이버가 더 배경이 좋은 팀으로 이적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많고 개발 능력도 뛰어난 상위권 대형 팀은 언제나 F1 드라이버 모두에 대한 스카우트 리포트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약 조건이나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졌을 때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상위권 팀이 경쟁 팀, 혹은 중위권이나 하위권 팀에서 가능성을 보인 드라이버를 ‘발탁’해가는 것이 F1에서는 비교적 분위기가 좋은 드라이버 이적의 경우라고 얘기합니다.

    둘째, 성적이 나쁜 드라이버가 방출된 뒤 배경이 더 나쁜 팀의 시트를 차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배경이 더 좋은 팀에서 쫓겨난 드라이버가, 겨우 머물 장소를 찾아내는 ‘그다지 기분 좋지 않은’ 이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방출된 드라이버가 새 팀을 찾지 못한다면 은퇴를 하거나 1선에서 물러나 안식년을 가져야 하므로, 상당히 불안한 드라이버 이적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외에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몇 가지 경우를 더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는 위 두 가지 이외의 경우의 수로 대부분의 드라이버 이적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코 훌켄버그의 르노 이적은 기존 F1 드라이버의 이적을 설명하는 두 가지 큰 틀의 경우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 중위권 팀 포스인디아에서 하위권 팀 르노 이적을 결정한 니코 훌켄버그 ]

    중위권 팀 포스인디아에서 하위권 팀 르노 이적을 결정한 니코 훌켄버그

    훌켄버그는 F1 스카우트 리포트에서도 상당히 높게 평가되는 드라이버 중 한 명입니다. 2009시즌 F1 드라이버의 등용문인 GP2 시리즈에서 챔피언에 오를 때의 훌켄버그는 그 어떤 경쟁자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독보적인 능력을 과시했었습니다. F1에 진출한 뒤에도 사람들의 기대를 한참 뛰어넘는 엄청난 능력을 여러 차례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F1 그랑프리 레이스가 없는 주말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원포인트 출전해 데뷔 우승을 차지한 것도 훌켄버그의 주가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량에 비해 최고의 팀에서 최고의 성적을 노릴만한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훌켄버그의 데뷔 때 소속 팀이었던 윌리암스는 전통의 명문 팀이지만, 훌켄버그가 F1의 맛을 보기 시작했을 때만큼은 팀의 암흑기로 경쟁력이 없던 시기였습니다. 1년의 휴식을 거쳐 몸담았던 포스인디아와 자우버는 중하위권 팀으로 최고의 성적을 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포스인디아의 전력이 매우 강해졌지만, 최고의 탑 팀과는 분명한 격차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결국, 훌켄버그는 실력에 비해 강팀에 합류할 기회가 없어 진흙 속에 묻힌 진주가 되어버렸습니다. 2016시즌은 물론 내년 2017시즌에도 최강 3팀, 메르세데스, 레드불, 페라리에는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훌켄버그의 처지는 달라질 것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 소속 팀 포스인디아의 전력이 몰라보게 강해진 것도 훌켄버근의 발목을 잡습니다. 3강에 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중위권 팀이지만 적어도 최근의 전력은 ‘3강을 제외한 팀 중 최강’이라고 평가해도 될 정도입니다.

    팀과의 계약이 남아 있어 2017시즌에도 자신이 특별히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팀에 남을 수 있는 상황, 소속 팀 포스인디아 입장에서도 훌켄버그보다 더 좋은 드라이버를 구하는 것이 매우 힘든 상황에서 다른 선택은 없어 보였습니다. 기존의 데이터와 최근 성적을 봤을 때 훌켄버그에게 가장 좋은 자리는 현 소속 팀 포스인디아가 분명해 보입니다. 적어도 올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팬들이나 전문가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들

    그런데 훌켄버그는 이적을 결심했습니다. 그것도 2016시즌 기준으로 전체 9위에 머무르고 있는 하위권 팀 르노로의 이적입니다. 안정된 팀의 전력, 그중에서도 성적으로 입증된 최근의 전력이 가치 판단에서 가장 중요한 F1에서, 하위권 팀으로의 ‘자발적인 이적’은 생각하기 힘든 결정입니다. 적어도 5위권의 성적을 낼 수 있는 기존 팀에서 하위권 팀으로 이적을 결정한 이유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훌켄버그의 르노 이적은 도전입니다.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투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생각이기도 하지요. 아무리 3등도 하기 힘든 자리라도 조금이나마 안정적인 자리를 찾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나라가 아니더라도 좀 더 보수적인 접근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나라라도 다수의 사람이 보수적인 선택과 함께 안정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훌켄버그의 도전이 더 의미가 깊어 보입니다. 4등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힘들더라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겠다는 도전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르노는 비록 현재까지 상황이 매우 좋지 않지만,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있는 ‘팩토리 팀’이기 때문입니다. 메르세데스나 페라리와 같이 ‘엔진을 직접 만드는’ 팩토리 팀이어야만 최고의 성적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의 포스인디아와 같은 독립 팀만도 못한 성적을 낼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모험이자 도박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모험이자 도박이더라도 조금이나마 기회가 있는 부분에 투자하는 것이, 만년 4위 이하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낫다는 훌켄버그의 판단은 F1에서라면 흔한 일일까요? 물론 흔하지는 않지만 1년 전 신생 팀 하스로 이적을 결정한 로망 그로장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6시즌을 앞두고 신생팀 하스로 이적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로장

    2016시즌을 앞두고 신생팀 하스로 이적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그로장(가운데)

    지금으로부터 1년 전 훌켄버그가 이적을 결심한 르노의 전신, 로터스에서 나름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고 있던 그로장은 돌연 하스로의 이적을 발표했었습니다. 보통 신생팀이 F1에 진출하면 절반 정도는 몇 년간 최하위 수준을 맴돌다 문을 닫고, 나머지 절반도 결코 중위권 팀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널리 알려진 기록이었습니다. 그로장의 선택 역시 당시 무모한 도전이나 도박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로장의 도전은 성공을 거뒀습니다. 예상을 깨고 하스는 최하위권이 아닌 중위권의 전력을 보여줬고, 데뷔 시즌에 전 소속 팀을 압도하는 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의 자리에 안주해 남아 있었다면, 그로장은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줄 새로운 기회를 찾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올 시즌의 선전 덕분에 최강 3팀 등 대형 팀에서 다음 드라이버 영입 후보로 그로장을 거론하기 시작한 것도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스포츠뿐 아니라 경제, 사회, 정치 등 거의 모든 부문에서 우리나라라면 이런 ‘도전’ 자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종의 카르텔이 사회 전체를 보호막처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어렵지 않게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도전은 쉽지 않습니다. 도전에 나섰다가 그나마 얼마 가지고 있지 않은 현재의 자산마저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F1에서 안정된 기반을 박차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 훌켄버그와 그로장의 도전이 부러운 것은, 모두가 도전적이고,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선택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수의 사람이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되고 납득이 되기 때문이랄 수도 있습니다. 다수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만 적어도 진보적이라는 사람이라면 기존의 틀, 기존의 이름, 기존의 안정된 지지 기반 등에 안주하지 않고, 비록 확실한 것이 없더라도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곳에 투자하는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사회, 경제, 정치에서 진보적이라는 사람 중에는 이런 도전을 꺼리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4등 짜리 자리와 4등 짜리 이름에 만족하면서, 이 본전을 잘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지만, 이런 보수적인 사고를 하면서 ‘진보’라고 이름표를 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진보는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물론 F1이 진보적인 스포츠도 아니고, 훌켄버그가 이적하게 되는 르노 같은 팀이 진보의 가치와 맞는 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훌켄버그의 선택에는 미래의 변화와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도전’을 하겠다는 사람이 (따지고 보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는) 현실의 자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당연한 얘기조차 나누기도 쉽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은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필자소개
    2010년부터 지금까지 MBC SPORTS, SBS SPORTS, JTBC3 FOXSPORTS에서 F1 해설위원으로 활동. 조금은 왼쪽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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