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일조선인의 삶과 투쟁
    [책소개] 『자이니치의 정신사』(윤건차/ 한겨레출판)
        2016년 08월 27일 03: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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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在日) 1세, 2세, 3세를 아우르는 자이니치의 역사

    자이니치 2세이자 한-일 현대사상사의 빼어난 연구자인 윤건차 일본 가나가와대학 명예교수의 온 삶을 건 역작이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을 통해 2015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전 3권으로 출간된 『「在日」の精神史』가 한국에서는 928쪽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 책은 그 방대한 분량만큼 다루는 내용 역시 방대하다. “역사적인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선행 연구에 뒤지지 않는 학술서로 만듦과 동시에, 재일조선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자 했다”는 저자의 집필의도에 부합하게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식민지 시기 생존을 위한 도일(渡日), 갑작스런 해방과 분단, 남과 북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국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체성의 혼돈으로 이어지는 재일조선인의 총체적 역사를 각종 학술자료와 200명이 넘는 사람들과 만나 이루어진 인터뷰, 그리고 저자 본인의 이야기를 녹여 풀어내고 있다. 자이니치 2세로서 지금이 아니면 남길 수 없는 이야기를 모아 담으려고 애썼다고 한다.

    번역의 책임감수를 맡은 숙명여대 일본학과 박진우 교수는 옮긴이의 말을 통해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재일조선인 문제와 관련되는 실로 다양하고 복잡한 문제군을 때로는 서정적으로, 때로는 긴장감 넘치게, 그리고 때로는 신랄하고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고 전한다.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진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자이니치’에 대한 이해야말로 동아시아의 새로운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지금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며, 『자이니치의 정신사』는 이를 위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이니치의 정신사

    그들은 어떻게 재일조선인이 되었는가?

    저자는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 앞서 단어 선택의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자이니치,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재일코리안, 재일동포, 재일교포 등의 용어가 모두 일정한 정치성. 이데올로기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에 대해서도 북, 북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공화국), 남, 남조선, 대한민국(한국) 등이 모두 정치성. 이데올로기성을 갖는 용어들이다. 한국어판에서는 남조선-북조선의 표현보다는 남한-북한의 용어를 채택했지만, ‘재일’과 관련해서는 주로 ‘재일조선인’과 ‘자이니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일조선인’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을 의미하는 역사적 용어다. 하지만 그 출발은 근대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 지배다. 1910년의 ‘병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은 해마다 늘어 해방 당시에는 200만 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 인구 10퍼센트에 가까운 수다. 생계를 위해 ‘밀항’을 시도한 이부터 일본 본토의 노동력 부족 때문에 ‘강제 연행’된 이까지 다양하다. 이들은 해방 이후 조국 귀환을 서둘렀지만, 결과적으로 60~70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게 되었다.

    저자 자신이 일본에 남게 된 사연 역시 인상적이다. 1930년대에 도일한 부모 밑에서 1944년 12월 태어난 저자는 다섯 살 무렵 가족들과 함께 귀환하려 했다. 소지금에 제한이 있어서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물품으로 바꿔 전 재산을 꾸려 마이즈루 항의 대기소로 들어간 것이 1950년 4월 6일이다. 온 가족이 귀환을 기다리며 몇 달을 대기소에 머물렀고, 6월 23일 화물이 세관 검사를 거쳐 귀환선에 적재되었다.

    하지만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였고, 연합국 지령에 의해 송환 작업은 일시 정지되었다. 결국 8월 16일 송환의 무기 연기와 대기소 수용자들에 대한 해산 명령이 떨어졌고, 이들은 10월 말까지 강제 퇴거당한다. 심지어 돈까지, 모든 것을 처분하고 준비했던 귀환이 무산되어 길바닥에 나앉은 저자의 가족은 간신히 교토 니시진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새 삶을 시작한다. 많은 재일조선인들이 이와 같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내몰려지곤 했다.

    한반도와 일본 근현대사의 굴곡과 그 사이에 놓인 재일조선인의 삶과 투쟁

    재일조선인은 일본 사회의 비민주적인 체질과 한반도의 분단에 의해 가혹하고 고통에 찬 길을 걸어왔지만, 그 가운데 풍부한 정신적 유산도 남겨왔다. 저자에 따르면, 일본 근현대사에는 서구의 일본 침략, 그에 맞선 천황 중심의 국민 통합, 이를 바탕으로 한 일본 스스로를 위한 아시아 침략이라는 세 가지 기둥이 존재한다. 그에 따라 서구 숭배 사상, 천황제 이데올로기, 아시아 멸시관이라는 세 축을 통해 일본 국민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왔다.

    한편 한반도의 근현대사에는, 첫째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반제.반봉건 투쟁, 둘째 일본 제국에 의한 식민지 근대화의 강요, 셋째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남북 분단이라는 세 기둥이 존재한다. 한국 민주화 운동이 이른바 반제.반봉건 투쟁, 탈식민지화 투쟁, 남북통일 투쟁을 축으로 전개되어 온 것과 궤를 함께한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은 이 여섯 개의 기둥과 밀접한 삶을 살고 이를 위해 투쟁해 온 것이다.

    식민지 시기 재일노총(재일본조선노동총연맹)의 활약, 해방 후 조련(재일본조선인연맹)의 결성과 일본공산당과의 연대 등 재일조선인 운동은 계급 운동이자 민족 운동인 측면이 강했고, 일본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해방을 향해 동시에 나아갔다.

    하지만 재일조선인 사회도 조국의 분단 앞에 자유로울 순 없었다. 조련은 1946년 2월 여운형 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고, 조련에서 이탈한 보수.반공 성향의 사람들은 건청(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동(신조선건설동맹)을 조직하여 조련과 반목하기 시작한다. 이후 건청.건동의 흐름은 민단(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 후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이어지며 남한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고, 조련은 좌익적 성향이 강해지며 후일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흐름과 맞닿게 된다.

    재일 2세의 자각과 ‘자이니치’란 말

    1970년은 재일조선인에게 큰 전환기가 된 해였다. ‘히타치 취업 차별 재판’이 시작된 해이다. 입사 시험에서 본명란에 일본 이름을 적고 본적지에 일본 현주소를 기입한 재일 2세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채용을 취소한 히타치를 제소, 4년의 재판을 통해 승리를 거둔 사건이다. 이 사건이 중요한 것은 재일조선인 운동에 있어서 남북 본국과의 관계나 통일 문제에 끌려가기보다는 차별 사회인 일본 안에서 필사적으로 살아갈 것을 모색하는 움직임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러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재일조선인’이나 ‘재일한국인’이라는 말보다 ‘자이니치’라는 말이 적극적으로 쓰이기 시작한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후 복잡해진 정치 상황 속에서 ‘자이니치’라는 말은 ‘조선’ 국적이냐 ‘한국’ 국적이냐 하는 국적 표시의 차이를 넘어, 일본과 남‧북 ‘세 개의 국가’ 틈바구니 속에서 사는 재일조선인을 통칭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젊은 세대(재일 2세)가 살아가기 위한 어떤 사상이나 그 역사적 의미를 포함하는 말로 받아들여지면서 ‘자이니치로 산다’는 표현도 퍼져 나갔다. 재일 2세들은 청춘의 혼돈, 고뇌, 불안, 공포 속에서 취업, 결혼 등의 생활의 절실한 문제를 껴안고 사회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조명하는 북한 문제와 젠더 문제

    책은 모두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을, 2장은 ‘해방 이후, 점령 공간의 재일조선인’을, 3장은 ‘한국전쟁과 재일조선인’을 다룬다. 4장에서는 조총련의 탄생 과정과 해방 이후 민족을 둘러싼 갈등을 이야기하고, 5장에서는 북한의 귀국 사업에서부터 4.19 그리고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와 한일조약으로 이어지는 시기를 다루고, 6장에서는 조총련과 민단 사이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자이니치’에 주목한다. 7장에서는 1970~198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과 함께 ‘재일조선인의 일본인 아내’라는 주제에 접근하고, 8장에서는 재일정치범 양산과 인권 문제를 다룬다. 9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 다양한 자이니치의 모습과 앞으로의 길을 모색한다.

    100여 년의 재일조선인사를 다양한 인터뷰와 자신의 경험을 녹여 풀어낸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는 이제까지의 한일 관계에 대한 문제에 더하여 조총련 문제를 포함한 북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남북한이라는 ‘세 개의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자이니치’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해 어떻게 신음하고 고뇌해 왔으며, 또한 일본 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고투해 왔는가를 갖가지 정치권력, 조직, 세력, 인간군상 등을 통해 파헤치고 있다. 국가권력의 공포성, 민족 조직의 흡인력과 배타성, 반권력 속에 깃든 교활한 권력성과 같은 민감하고 신중한 문제에 과감히 메스를 들이대는 저자의 열정과 용기에 새삼 숙연해진다.

    또 하나의 특징은 민족, 계급, 국가의 문제에 더하여 젠더의 문제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7장 2절 ‘재일조선인의 일본인 아내’, 9장 1절 ‘아이덴티티의 동요, 그리고 표현자로서의 재일조선인 여성’ 등의 부분을 따로 만들고, 남녀의 문제, 가족 간의 애증, 그 속에서 자이니치의 갖가지 고뇌와 갈등, 고통, 과오, 위선 등을 여과 없이 그려내고 있다. 그 가운데 저자 자신의 이야기도 숨기지 않고 서술하고 있다.

    현재진행형인 자이니치 문제

    이 책의 제목은 ‘정신사’이지만 그 내용은 재일조선인의 사상·정신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이라는 세 개의 국가 사이에서 자이니치가 가지는 의미를 역사·정치·사회·문화·문학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금까지의 재일조선인 연구를 총괄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마지막에서 말하고 있듯,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적 체질과 여전히 해결될 길이 보이지 않는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서, 자이니치의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책을 계기로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이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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